독일 기본법과 독일의 민주주의 (2)

가아닌양| 독일 뉴스 길게 읽기|2019. 6. 1. 06:47

독일의 기본법 79조는 기본법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수정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명시함으로써 과거처럼 법의 근간이 파괴될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다. 독일의 기본법은 민주주의와 공화주의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을 보여준다. 공화국은 한 국가가 특수한 소수가 아닌 공공을 위한 것임을 의미한다. 이때 공공성은 수적으로 우세한 민족이나 인종을 지시하지 않으며, 대중을 지시하지도 않는다. 그런점에서 독일연방공화국은 다수에 의한 지배가 어떻게 국가의 공공성을 파괴했는지를 역사속에서 배웠다. 독일 기본법은 공화국의 공공성을 보존하기 위해 민주주의보다는 체제의 견고성을 택하고 있다. 기본법의 입안자들은 분단된 독일연방공화국, 즉 서독의 새로운 체제가 임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무분별한 민주주의에 의한 법의 파괴 가능성에 대해서는 민감했다.   

 

고대 아테네에서 민주주의는 다수에 의한 자의적 지배를 비난하기 위한 용어로 사용되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이상적인 국가는 법에 의해 지배되는 국가이지 다수에 의해 지배되는 국가가 아니었다(플라톤의 법률편은 철학자의 지배가 아닌 법에 의한 지배를 탐구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주권자와의 관계 속에서 이상적인 국가가 무엇인지를 체계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누가 주권자인지를 통해 국가의 지배체제를 설명하고 있다. 1인이 지배하는 전제정은 1인을 위해 존재한다. 소수 부자들에 의한 지배체제인 과두정은 그들 집단의 특수 이익을 위해 봉사한다. 매우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구분은 뛰어난 자들에 의한 지배체제(흔히 귀족정이라 불리는)와 숫자가 많은 가난한 다수에 의한 지배체제의 문제로 넘어갔을 때 복잡한 모습을 갖는다. 뛰어난 자들은 자시들이 아닌 공동체를 위해 정치에 참여한다. 하지만 모두를 위한 공동체에서는 뛰어나지 않은 자들도 시민이다. 여기에서 모순은 발생한다. 모두를 위한 공동체는 모두의 몫을 보장한다. 따라서 공동체에 속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시민이어야만 하고, 시민은 국가에 대한 몫을 갖고 있다. 이 때 등장하는 것이 법에 의한 지배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법에 의한 지배체제는 각각에게 능력에 맞는 임무를 주는 지배체제이다. 법에 의한 지배체제는 한편으로 전제정과 과두정을 막고 있다. 하지만 법에 의한 지배는 다른 한편으로 다수에 의한 무분별한 지배를 막고, 국가의 지속성을 보증한다

 

대중에 대한 고대철학자들의 불신과 달리 고대 아테네는 다수에 의한 지배체제가 아니었다. 고대 아테의 민주정은 원래부터 법에 의한 지배체제였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와 자크 랑시에르는 고대 아테네의 정치체를 이소노미(법에 의한 지배: Isonomie)로 정의하며 공화국과 인민이 갖는 관계를 재검토한다. 한나 아렌트에게서 법은 서로 다른 삶의 조건을 가진 사람들을 평등하게 만들어 준다. 법에 의한 지배는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외적 배경과 상관 없이, 사람들을 새롭게 연결시켜주는 틀이 된다. 법은 우월하지 않은 사람을 공공영역으로 포함시키며, 자신이 우월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공공의 영역과 뛰어나지 않은 사람들을 위협하지 못하게 한다. 법만이 서로 다른 시민들을 평등하게 하며,  정치는 평등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랑시에르에게 이소노미는 정치적 몫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은 다수를 다른 사람들과 평등하게 만들어주는 정치체이다. 다수에 의한 지배라고 비난받는 민주주의는 다수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숫자가 많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장점이 없는 가난한 자들, 소외된 자들을 다른 이들과 평등하게 만들어주는 체제이다. 이소노미(법에 의한 지배)체제 속에서는 뛰어난 자들, 부자인 자들도 다수와 똑같은 정치적 몫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소노미는 결국 민주주의이다.  공공성을 위한 국가인 공화국은 모두를 평등한 시민으로 묶어주는 체제라는 점에서 결국은 민주주의이다. 공공성을 보장하고, 공공성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는 국가만이 부자도 아니고, 우월한 자도 아닌 인민의 몫을 보장한다. 인민은 다수가 아니라 공화국 안에서만 자신의 몫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기본법은 통일 독일이 아닌 서독에서 만들어진 법이기 때문에 만들 당시부터 독일 통일에 대한 두 가지 안을 담고 있었다. 23조는 독일 연방에 새로운 주들이 가입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었으며(23조는 통일 이후 다른 내용으로 바뀌었다), 146조는 독일의 통일과 평화가 완성되면 독일 국민이 새로운 헌법을 만들어 과거의 기본법을 대체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새로운 헌법을 만들기 위한 모임이 사민당, 녹색당, 민주사회당(PDS) 정치인들과 철학자 하버마스를 포함한 지식인들로 구성되었다. 기본법의 내용을 기초로 하고 국민청원, 국민투표와 같은 직접민주주의 요소와 노동과 주거의 권리 같은 사회주의 요소가 강화된 안이 만들어졌다. 모임을 주도했던 동독 출신의 녹색당 정치인 베르너 슐츠(Werner Schulz)는 당시의 모임이 국가 권력의 원천을 다시 국민들에게로돌려주기를 원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구서독의 정치인들은 구동독의 주들이 독일연방에 편입되는 23조의 방식을 선택했다. 그리고 기본법은 통일 이후에도 독일의 헌법역할을 하고 있다.

 

기본법 70주년을 맞아 민주주의 요소가 강화되어야 한다는 문제가 다시 제기되고 있다. 지역단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국민청원과 국민투표가 연방단위에서도 보장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시민들은 인터넷과 같은 매체를 통해 즉각적으로 정치적 문제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으며 더 이상 과거와 같이 수동적으로 뉴스를 접하지 않는다. 기후변화와 같은 주제에 대해서는 정치권보다 시민들이 민감하게 반응하고 결정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반대편에서는 직접민주주의가 극우주의의 등장하게 만든다며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이고 있다. 특히 극우정당인 AfD의 정치인들이 헌법과 의회의 대표성에 대해 공격하는 가운데 기본법의 정신과 안전성을 강조하는 입장이 존재한다. 이에 대해 쥐드도이체 짜이퉁(Süddeutsche Zeitung)지는 인간을 신뢰한다면이라는 제목의 한 칼럼을 통해 반론을 제기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의회에 의해 무너졌다. 국민투표가 아닌 의회가 히틀러에게 전권을 부여했다. 칼럼에 따르면 국민투표는 더 빠른 발전을 가져오기도 한다. 1971년 스위스는 국민투표를 통해 환경보호 항목을 헌법에 포함시켰다. 이에 반해 독일은 1994년에야 환경보호를 헌법에 포함시켰다.

 

지난 역사는 특권적 집단으로서 다수(인종, 민족, 이데올로기 집단)가 법에 의한 지배를 대체했을 때 어떤 형태의 국가가 등장하는지를 보여줬다. 하지만 이것이 무절제한 민주주의에 의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지난 523일 독일연방공화국은 탄생 70주년을 맞이했다. 194958일에 통과된 법은 23일에 공표되었다. 비록 기본법을 만들었던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두려워했지만, 공화국과 기본법이 70년 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민주주의때문이다. 독일연방공화국은 70년 동안 여러가지 방식으로 시민의 새로운 몫을 국가 안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독일 언론은 기본법 70주년을 맞아 구체적인 법률들을 시대에 맞게 재정립하는 판결을 내렸던 독일 헌법재판소의 역할과 녹색당과 같이 새로운 정당이 의회에 포함된 역사적 흐름을 함께 조명했다. 법과 국가체제는 새로운 해석과 역동성을 통해서 시민이 가진 몫을 끊임없이 재확인해야 한고, 그러한 확장을 통해서만 보존된다. 그런 점에서 공화국의 보존은 언제나 평범한 시민이 가진 몫을 보장하는 체제, 즉 민주주의이다.

 

 

 

 

'독일 뉴스 길게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일 기본법과 독일의 민주주의 (1)  (0) 2019.05.18

노동(Arbeit)-노동의 위기와 사회주의 이념의 위기(1)

가아닌양| 정치철학의 개념들|2019. 4. 20. 07:04

노동(Arbeit)-노동의 위기와 사회주의 이념의 위기

 

앙드레 고로

 

»사회주의의 위기는 무엇보다 프롤레타리아의 위기다. 다양한 능력 다양한 능력을 보유한 전문기술 노동자들, 곧 자신의 생산적 일을 할 수 있는 주체, 따라서 사회관계들을 혁명적으로 변혁시킬 수 있는 그 노동자들과 더불어, 사회주의적 프로젝트를 책임질 수 있고 이 프로젝트를 현실화할 수 있는 계급은 사라졌다. 사회주의의 이론과 실천이 퇴락하게 된 것은 근본적으로 그 이유 때문이다.«(1)

 

앙드레 고로가 자신의 저서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을 통해 전통적인 노동자 중심의 계급투쟁을 통해 사회주의이념을 실현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주장한지 30여년의 시간이 지났다. 그는 기술의 발전이 기존의 노동자계급을 해체시켰으며,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과 전복이 노동자-자본가의 대립을 통해 이루어질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1960년대 서구사회에서 이미 시작된 전통적 노동자계급에  속하지 않은 비계급(정규직-노동자에 속하지 않은 사람 뿐 아니라 다양한 활동을 하는 사람들. 비계급은 이미 정치의 출발부터 존재해왔다. 이 문제에 대한 적절한 예를 랑시에르가 고대 그리스 시민국가와 농촌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불화")의 증가는(우리가 흔히 비정규직의 증가라고 이야기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식한 문제가 된지 오래지만, 노동의 위기와 노동자계급의 해체에 대한 담론은 여전히 대안을 찾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다. 그리고 앙드레 고로가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에서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국가와 사회는 여전히 불필요한 노동을 생산해내는 것에 사활을 걸고 있다.

 

물론 30년 동안 아무런 대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학자들은 프롤레타리아라는 개념을 안정적인 어떠한 계급에도 속하지 않은 비계급을 지시하는 개념으로 해석하려 시도 했으며, 기본소득과 같이 기존 사회주의 이념과 충돌하는 대안이 이제 많은 사람에게 익숙해졌다. 하지만 고로가 이야기한 불필요한 노동-생산관계로부터의 해방은 여전히 요원한 일인것처럼 보인다. 불필요한 노동자들의 생산은 여전히 국가와 사회의 주요 과제이며, 비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경제적 필요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활동을 노동으로 환원시키는 것이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 점에서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모두가 노동자가 된, 모든 활동이 노동으로 환원되는 대중사회가 사회주의 이념의 종말을 가져왔다고 분석했다. 아렌트의 주장은 노동자계급이 해체되었다는 고로의 주장과 정 반대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렌트의 주장 또한 모두가 노동자가 되면서 특수한 계급으로서 사회변역의 주체가 되는 노동자계급을 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한편 앙드레 고로는 프롤레타리아를 호명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페미니즘을 기존의 노동-생산 관계를 전복하는 가장 뛰어난 운동으로 호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여성적인 활동(비 생산적 활동)전자본주의 시대의 잔해이기는 커녕, 반대로 후기자본주의의와 후기산업사회의 문화와 문명을 예고한다.“(1-1) 페미니즘은 사회적운동을 노동-생산관계로부터 새로운 관계, 자본과 다른 관계의 문제로 시선을 돌리게 한다. 기존 가부장적 시대에 여성들이 하던 활동은 경제생산관계에 종속된 한에서만 억압적이다.

 

하지만 새로운 사회적 관계의 탄생에 대한 낙관적 전망에도 사회주의 이념의 붕괴는 심각한 어려움을 우리에게 남겨준다. 사회주의 이념의 붕괴는 생존, 삶을 위한 경제적 필요에 대한 공동체적 책임의 붕괴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전통적으로 사회주의는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해결하기 위한 이념을 제공해왔다. 사회주의가 제공하는 공동체 이념을 대처하기 위한 여러가지 대안들이 존재하지만 여전히 생존과 삶을 위한 경제적 필요의 측면에서, 국가라는 거대사회가 선택할 수 있는 간편한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점에서 독일 사회민주당의 새로운 시도는 여전히 구시대의 이념을 붙잡고 있는 사회주의 정당의 마지막 외침처럼 들린다. 

 

»Deutschland ist und bleibt eine Arbeitsgesellschaft. Durch den technologischen Wandel wird uns die Arbeit nicht ausgehen, sie wird sich nur stark und immer schneller verändern. Unsere Antwort darauf ist das „Recht auf Arbeit“. Das bedeutet, dass sich die Solidargemeinschaft dazu verpflichtet, sich um jeden Einzelnen zu kümmern und jedem Arbeit und Teilhabe zu ermöglichen – statt sich durch ein bedingungsloses Grundeinkommen von dieser Verantwortung freizukaufen. (Arbeit – Solidarität – Menschlichkeit: Ein neuer Sozialstaat für eine neue Zeit, SPD)

 

독일은 지금까지 노동자사회였고앞으로도 그럴 것이다기술의 변화를 통해 노동이 우리에게 갖는 의미가 퇴색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단지 노동의 변화가 강력하고 점점 빠르게 일어날 뿐이다이러한 변화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노동의 권리“이다이는 기본소득과 같은 것을 통해 이러한 책임을 포기하는 것이 연대사회의 의무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연대사회는 각 개인을 돌보고 그들에게 노동과 사회적 몫을 보장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노동-연대-인간성새 시대를 위한 새로운 사회국가독일 사회민주당

 

위 인용문은 2018 2 10일 독일 사회민주당이 발표한 새로운 개혁안의 일부이다“노동-연대-인간성새 시대를 위한 새로운 사회국가”라는 제목을 단 17장짜리 합의문은 지속적인 지지율 하락을 겪고 있는 사민당이 새로운 반전을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다독일사회는 지표상의 경제 호황에도 불구하고 노동시장의 유연화와 실업급여화의 약화로 인해 인해 과거 사회국가(Sozialstaat)가 노동자계급에게 주는 안정감을 상실했다. 이는 또한 전통적인 임금노동자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민주당이 몰락하는 원인이 되었다(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글 참조https://umweltkorea.tistory.com/10?category=787270). 하지만 사회민주당에게도 변명은 있다. 사회민주당은 더 많은 노동을 생한해내는 것 외에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목표하는 것처럼 더 많은 일자리가 생산되었고, 국가의 생산력은 증가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삶이 경제적 필요의 충족이라는 점에서 악화되었다. 그리고 사민당은(사민당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의 원인을 안정적인 노동을 생산하지 못한 탓으로 돌렸다. 따라서 이번 개혁안에 담긴 사민당의 목표는 안정적인 노동자계급을 재구성하기 위한 국가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위 인용문에서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사민당은 사회국가의 재구성을 위해 “노동”과 “노동을 통한 사회적 몫”의 보장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그리고 노동사회를 부정하는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가 안정적인 노동시장의 창출과 이에 걸맞는 노동자들의 교육이라는 사회국가의 의무를 방기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하지만 “기본소득”에 대한 이러한 언급은 이미 과거의 노동사회가 위기에 처해있다는 것을 반증한다위 인용문에 등장하는 것처럼 기술의 변화는 노동이 갖고 있는 성격을 끊임없이 변화시키고 있다따라서 과거와 같이 정년이 보장된 안정적 일자리 개념은 사회의 발전과 공존할 수 없다따라서 실업과 노동을 위한 재교육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상시적인 활동이 될 수밖에 없다(이는 사민당의 개혁안 속에 지속적으로 강조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노동”이라는 이념 위에 자리하고 있는 사민당은 “비노동” 상태를 예외상태로 “노동”을 일상의 상태로 구성해야만 한다.  따라서 기본소득처럼 “비노동”을 일상의 상태로 인정하는 아이디어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 “비노동”의 기간은 노동을 위한 준비기간이다.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통 속에서 “노동”은 인류와 역사발전의 원동력일 뿐만 아니라인간을 역사 창조의 주체로 존재로 만들어준다(2).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산업 혁명과 프랑스 혁명이후 과거처럼 귀족이나 특정 계급이 가지고 있는 능력에서 국가와 사회의 원리를 도출해내는 것이 불가능해졌다이제 국가와 사회는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부터 자신들의 원리를 도출해내야 한다그리고 그것이 노동이다마르크스는 이러한 세계의 변화를 가장 민감하게 포착했다(3). 하지만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의 전통 속에서 노동이 사회 변화의 원동력으로서의 의미 뿐 아니라공동체 구성의 규범적 원리로서 작동한다악섹 호네트는 „사회주의의 이념(Die Idee des Sozialismus, 한국어 제목사회주의 재발명)“을 통해 사회적 연대의 기초로서 노동이 가지고 있는 규범적 의미를 밝히고 있다자본주의의 또한 노동에 기초하고 있지만 자본주의의 노동은 자기실현과 자기 이익의 관철을 목표로 한다따라서 타자의 노동이 갖는 목표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하지만 이에 반해 사회주의의 이념 속에 노동은 타자를 포함하고 있다각 개인은 자신의 노동 가운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의 발현 뿐 아니라타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의 발현을 목적으로 가져야만 한다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의  노동은 내 자신의 필요와 욕구 뿐 아니라타자의 필요와 욕구를  인정한다따라서 나의 노동은 나와 타자의 필요를 충족 시킬 것을 목표로 한다(4). 호네트에 따르면 노동을 통한 상호적 인정은  사회주의의 이념 속에서 공동체를 구성하는 윤리적 규범이기도 하다.

 

노동이 공동체를 구성하는 윤리적 규범이라는 것은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이는 각 개인의 활동에 대한 사회적 인정이 노동이라는 개념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각 개인이 자신의 삶에 대한 의미를 노동을 통해 성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윤리적이다.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 윤리로부터 도출한 것처럼 직업은 현대인에게 지상적 삶을 보증한다.  비록 앙드레 고로가 인간의 일상적 삶이 노동으로부터 분리되고 있다고, 일상적 삶의 의미는 자유시간 속에서 형성되며 노동은 삶의 의미로부터 분리되고 있다고 이이갸하지만(5), 이러한 주장은 의심스럽다. 적어도 사회적 인정이라는 점에서 노동은 여전히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물론 부정적인 효과가 더 크다). 그런 점에서 호네트의 분석은 아직 유효한 것처럼 보이며, 노동이 아닌 곳에서 각 개인이 자기 삶의 정당성을 찾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모든 것을 노동으로 환원하는 각종 사회적 구호 속에 노동이라는 윤리적 규범이 갖는 힘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윤리적 규범은 노동을 벗어나 각 개인의 경제적 필요를 돌보는 공동체의 이념을 구성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걸림돌이다. 이는 고통에 찬 타자를 외면하게 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규제한다. 그런 점에서 "노동의 권리"라는 독일 사민당의 구호는 아직도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여전히 앙드레 고로가 지적한 것처럼 독일 사민당의 새로운 프로그램 또한 각 자의 노동이 어떻게 타자의 노동/필요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를 설명해주지 못한다(6). 사민당의 프로그램은 오히려 노동자들이 노동시장의 변화에 지속적으로 적응해야만 하는 생산과정의 필수적 요소가 아닌 외부적 요소가 되었다는 것을 재확인하고 있다. 이는 마르크스주의 전통 속에 이야기되는 생산력의 가장 중요한 원인인 노동자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할 뿐 아니라, 노동자가 더 이상 공동체의 필요에 기여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노동자는 자신의 필요충족을 위해 생산시스템 속에 자신의 자리를 구걸하는 위치에 처했있다. 정치/사회는 이제 기업에게 자동화 설비 속에 노동자를 위한 약간의 자리라도 시혜적으로 남겨줄 것을 구걸하거나, 무의미한 발전을 통해 일자리를 만들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노동의 강화는 정치적 주체가 아닌 관리와 시혜의 대상을 만들어낼 뿐이다. 

 

악셀 호네트는 스위스 한 방송국의 철학 프로그램에서 기본소득운동은 운동의 주체를 호명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남점을 갖고 있다는 의견을 밝혔다. 운동의 주체는 공동체 속에 자기 자신의 자리에 대한 정치적 재규정으로부터 탄생한다. (그런 점에서 프롤레타리아를 비계급으로부터 구성해내려는 모든 운동은 난점을 갖고 있다.). 비록 기본소득 운동이 시민이라는 이름을 새로운 주체의 이름으로 전유하려 시도해왔지만, 시민이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 주체인지 재구성해내지 못한다면 정치적 주체로서 시민이라는 이름을 전유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시민"과 경제적 필요의 관계를 어떻게 재구성해낼 수 있는지도 어려운 숙제이다. 하지만 이는 호네트가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하는 "사회주의의 이념"에 대해서도 똑같이 물어질 수 있다. 노동자 없는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어떻게 스스로 운동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1)앙드레 고로, 이현웅 옮김,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서울: 생각의 나무, 105.

(1-1) 같은 책 139.

(2) Karl Marx, Friedrich Engels,  »Deutsche Ideologie«, in: Marx-Engels-Werke(MEW), Bd.3, Berlin 1956, S. 28 ff .

(3) Arendt, Hannah, Vita activa oder Vom tätigen Leben, München: Piper, 2013, S. 103 f, 125; Arendt Hannah, »Tradition and the Modern Age«, in: Hannah Arendt. Kritische Gesamtausgabe, Band.6(The Modern Challenge to Tradition: Fragmente eines Buchs), Göttingen  2018, S 496; Arendt, Hannah, »Vom Hegel zu Marx«, in: Hannah Arendt. Kritische Gesamtausgabe, Band.6(The Modern Challenge to Tradition: Fragmente eines Buchs), Göttingen  2018, S. 98 f.

(4) Honneth, Axel, Die Idee des Sozialismus: Versuch einer Aktualisierung, Berlin: suhrkamp, 2010, S. 35-50.

(5) Gorz, André, übersetzt von Otto Kallscheuer, Kritik der ökonomischen Vernunft, Zürich: Rotbuch, 1998.

(6) 같은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