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기본법과 독일의 민주주의 (2)

가아닌양| 독일 뉴스 길게 읽기|2019. 6. 1. 06:47

독일의 기본법 79조는 기본법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수정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명시함으로써 과거처럼 법의 근간이 파괴될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다. 독일의 기본법은 민주주의와 공화주의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을 보여준다. 공화국은 한 국가가 특수한 소수가 아닌 공공을 위한 것임을 의미한다. 이때 공공성은 수적으로 우세한 민족이나 인종을 지시하지 않으며, 대중을 지시하지도 않는다. 그런점에서 독일연방공화국은 다수에 의한 지배가 어떻게 국가의 공공성을 파괴했는지를 역사속에서 배웠다. 독일 기본법은 공화국의 공공성을 보존하기 위해 민주주의보다는 체제의 견고성을 택하고 있다. 기본법의 입안자들은 분단된 독일연방공화국, 즉 서독의 새로운 체제가 임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무분별한 민주주의에 의한 법의 파괴 가능성에 대해서는 민감했다.   

 

고대 아테네에서 민주주의는 다수에 의한 자의적 지배를 비난하기 위한 용어로 사용되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이상적인 국가는 법에 의해 지배되는 국가이지 다수에 의해 지배되는 국가가 아니었다(플라톤의 법률편은 철학자의 지배가 아닌 법에 의한 지배를 탐구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주권자와의 관계 속에서 이상적인 국가가 무엇인지를 체계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누가 주권자인지를 통해 국가의 지배체제를 설명하고 있다. 1인이 지배하는 전제정은 1인을 위해 존재한다. 소수 부자들에 의한 지배체제인 과두정은 그들 집단의 특수 이익을 위해 봉사한다. 매우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구분은 뛰어난 자들에 의한 지배체제(흔히 귀족정이라 불리는)와 숫자가 많은 가난한 다수에 의한 지배체제의 문제로 넘어갔을 때 복잡한 모습을 갖는다. 뛰어난 자들은 자시들이 아닌 공동체를 위해 정치에 참여한다. 하지만 모두를 위한 공동체에서는 뛰어나지 않은 자들도 시민이다. 여기에서 모순은 발생한다. 모두를 위한 공동체는 모두의 몫을 보장한다. 따라서 공동체에 속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시민이어야만 하고, 시민은 국가에 대한 몫을 갖고 있다. 이 때 등장하는 것이 법에 의한 지배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법에 의한 지배체제는 각각에게 능력에 맞는 임무를 주는 지배체제이다. 법에 의한 지배체제는 한편으로 전제정과 과두정을 막고 있다. 하지만 법에 의한 지배는 다른 한편으로 다수에 의한 무분별한 지배를 막고, 국가의 지속성을 보증한다

 

대중에 대한 고대철학자들의 불신과 달리 고대 아테네는 다수에 의한 지배체제가 아니었다. 고대 아테의 민주정은 원래부터 법에 의한 지배체제였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와 자크 랑시에르는 고대 아테네의 정치체를 이소노미(법에 의한 지배: Isonomie)로 정의하며 공화국과 인민이 갖는 관계를 재검토한다. 한나 아렌트에게서 법은 서로 다른 삶의 조건을 가진 사람들을 평등하게 만들어 준다. 법에 의한 지배는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외적 배경과 상관 없이, 사람들을 새롭게 연결시켜주는 틀이 된다. 법은 우월하지 않은 사람을 공공영역으로 포함시키며, 자신이 우월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공공의 영역과 뛰어나지 않은 사람들을 위협하지 못하게 한다. 법만이 서로 다른 시민들을 평등하게 하며,  정치는 평등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랑시에르에게 이소노미는 정치적 몫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은 다수를 다른 사람들과 평등하게 만들어주는 정치체이다. 다수에 의한 지배라고 비난받는 민주주의는 다수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숫자가 많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장점이 없는 가난한 자들, 소외된 자들을 다른 이들과 평등하게 만들어주는 체제이다. 이소노미(법에 의한 지배)체제 속에서는 뛰어난 자들, 부자인 자들도 다수와 똑같은 정치적 몫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소노미는 결국 민주주의이다.  공공성을 위한 국가인 공화국은 모두를 평등한 시민으로 묶어주는 체제라는 점에서 결국은 민주주의이다. 공공성을 보장하고, 공공성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는 국가만이 부자도 아니고, 우월한 자도 아닌 인민의 몫을 보장한다. 인민은 다수가 아니라 공화국 안에서만 자신의 몫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기본법은 통일 독일이 아닌 서독에서 만들어진 법이기 때문에 만들 당시부터 독일 통일에 대한 두 가지 안을 담고 있었다. 23조는 독일 연방에 새로운 주들이 가입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었으며(23조는 통일 이후 다른 내용으로 바뀌었다), 146조는 독일의 통일과 평화가 완성되면 독일 국민이 새로운 헌법을 만들어 과거의 기본법을 대체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새로운 헌법을 만들기 위한 모임이 사민당, 녹색당, 민주사회당(PDS) 정치인들과 철학자 하버마스를 포함한 지식인들로 구성되었다. 기본법의 내용을 기초로 하고 국민청원, 국민투표와 같은 직접민주주의 요소와 노동과 주거의 권리 같은 사회주의 요소가 강화된 안이 만들어졌다. 모임을 주도했던 동독 출신의 녹색당 정치인 베르너 슐츠(Werner Schulz)는 당시의 모임이 국가 권력의 원천을 다시 국민들에게로돌려주기를 원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구서독의 정치인들은 구동독의 주들이 독일연방에 편입되는 23조의 방식을 선택했다. 그리고 기본법은 통일 이후에도 독일의 헌법역할을 하고 있다.

 

기본법 70주년을 맞아 민주주의 요소가 강화되어야 한다는 문제가 다시 제기되고 있다. 지역단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국민청원과 국민투표가 연방단위에서도 보장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시민들은 인터넷과 같은 매체를 통해 즉각적으로 정치적 문제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으며 더 이상 과거와 같이 수동적으로 뉴스를 접하지 않는다. 기후변화와 같은 주제에 대해서는 정치권보다 시민들이 민감하게 반응하고 결정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반대편에서는 직접민주주의가 극우주의의 등장하게 만든다며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이고 있다. 특히 극우정당인 AfD의 정치인들이 헌법과 의회의 대표성에 대해 공격하는 가운데 기본법의 정신과 안전성을 강조하는 입장이 존재한다. 이에 대해 쥐드도이체 짜이퉁(Süddeutsche Zeitung)지는 인간을 신뢰한다면이라는 제목의 한 칼럼을 통해 반론을 제기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의회에 의해 무너졌다. 국민투표가 아닌 의회가 히틀러에게 전권을 부여했다. 칼럼에 따르면 국민투표는 더 빠른 발전을 가져오기도 한다. 1971년 스위스는 국민투표를 통해 환경보호 항목을 헌법에 포함시켰다. 이에 반해 독일은 1994년에야 환경보호를 헌법에 포함시켰다.

 

지난 역사는 특권적 집단으로서 다수(인종, 민족, 이데올로기 집단)가 법에 의한 지배를 대체했을 때 어떤 형태의 국가가 등장하는지를 보여줬다. 하지만 이것이 무절제한 민주주의에 의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지난 523일 독일연방공화국은 탄생 70주년을 맞이했다. 194958일에 통과된 법은 23일에 공표되었다. 비록 기본법을 만들었던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두려워했지만, 공화국과 기본법이 70년 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민주주의때문이다. 독일연방공화국은 70년 동안 여러가지 방식으로 시민의 새로운 몫을 국가 안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독일 언론은 기본법 70주년을 맞아 구체적인 법률들을 시대에 맞게 재정립하는 판결을 내렸던 독일 헌법재판소의 역할과 녹색당과 같이 새로운 정당이 의회에 포함된 역사적 흐름을 함께 조명했다. 법과 국가체제는 새로운 해석과 역동성을 통해서 시민이 가진 몫을 끊임없이 재확인해야 한고, 그러한 확장을 통해서만 보존된다. 그런 점에서 공화국의 보존은 언제나 평범한 시민이 가진 몫을 보장하는 체제, 즉 민주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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